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울 진공 작전 (문단 편집) === 만약 시행됐다면? ===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광복군의 진공작전이 무산되지 않고 일본의 항복이 조금만 늦춰져서 진공작전이 시행되어 분단이 안 됐을 것이니 강대국으로부터 간섭받지 않는 자주적인 나라가 되었을 것이니 하는 가정들을 예전부터 거론해왔으나 이는 '''타당하지 않다'''. 우선 광복군의 병력과 장비 등이 매우 형편없을 정도로 빈약해서 도저히 일본군을 이길 수준이 못 된다는 것은 둘째치고 광복군 지휘관들이 [[이순신]]처럼 연전연승으로 이긴다 쳐도 임정 주도의 정부가 수립될 가능성은 낮다. 소련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도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는데[* 미국 OSS가 진공작전을 직접 지원하긴 했지만 정작 OSS는 해방 직전까지 임시정부를 혹평했고 이는 [[미군정]]의 입장에 그대로 반영되었다.] [[장제스]]의 지지만 있어봐야 세계대전에서 가장 지분이 큰 두 열강을 설득하지 못하면 허사다. [[한국광복군]]은 '승리'가 목표였다기보다는 어디까지나 '참전' 자체에 의의를 둬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자주적인 주권정부로 발전하기는 어렵다. [[폴란드]]와 [[체코슬로바키아]]는 대전 이전에 독립국이었고, 비록 나치에 패배해 점령당했지만 [[바르샤바 봉기]]를 포함 주요 유명 전투란 전투에 전부 참전하여 수십만이 죽은 교전국임에도, 승전국으로 인정을 못 받았고 전후처리 과정에서 소련의 전리품으로 인정받아 나치 패망 후 뒤이어 들어온 소련군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공산화되었다.[* 특히 체코슬로바키아는 제2차 대전 독일군 해방 후 본국에서 치러진 자유 총선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이 압승을 거둔 뒤 소련의 지지를 받고 쿠데타를 일으켜 비공산 야당 세력들을 모조리 제거, 불법화하고 정권을 장악해 공산정권을 세우는 일까지 있었다.] 폴란드의 경우, 연합군의 일원으로 60만에 가까운 장병들이 싸웠고[* 미국, 소련, 중국, 영국 다음.] 여기에 폴란드 지하에서는 최소 40만 명의 폴란드 국내군이 활약하고 있었는데도 이 정도다. 그리고 전후 본국으로 귀국한 15,000여 명의 [[자유 폴란드군]] 장병들은 나치 독일 완장 차던 놈들 대신 자리잡은 빨간 완장 찬 매국노[* 이중에 엄청난 태세전환을 보인 친나치파들도 있었다. 영화 [[피아니스트(로만 폴란스키 영화)|피아니스트]]의 주인공 스필만이 아우슈비츠에 끌려가기 직전에 끌어내 준 [[유대인 경찰]]이 실제 전후에도 소련 완장을 차고 활동했다고 한다.]들에게 반동 취급을 받았고 수많은 폴란드 국내군 지도자들은 모스크바로 압송되어 고문되고 투옥되었다.[* 이 때문에 총사령관 오쿨리츠키는 차라리 게슈타포가 나았다고 블랙조크를 했을 정도.] 물론 영국에서의 대우도 탄압만 안 당했지 신세가 비참한 건 똑같았다. [[프랑스]]도 비록 나라가 거의 나치에 넘어가다시피 했지만 프랑스는 존재감이 적던 아시아 식민지인 조선[* 한일합방조약의 당위성이나 적법성과는 별개로 세계 거의 대부분의 국가들은 한일합방조약을 인정하였고 카이로 회담 이전까지 조선을 일본 영토로 인정하였다.]과 달리 세계 2, 3위를 다투던 강대국급 열강이니 미국이 낼름 먹을 수도 없고 [[프랑스 침공|비록 몇 주 만에 밀렸다지만]] 어쨌건 2차 대전 교전국이었다. 더불어 나치 점령 이후에도 프랑스 식민지 중엔 [[비시 프랑스|비시 정부]]의 통제를 받지 않는 지역이나 영국의 개입으로 탈환된 [[시리아]] 지역도 있었다. 파리 탈환 이후에는 다시 공식적으로 참전하여 자유 프랑스의 병력은 44년에 이미 40만 명이 넘었고, 전쟁 막바지에는 130만이 넘었는데[* 이는 서부 연합국 한정으로 4위에 이르는 수치이다. 자유 프랑스는 막판에 프랑스가 해방되면서 크게 몸집을 불린 것이었다.], 이는 수적으로 연합군에서 5번째로 많은 병력이었다. 별로 한 게 없어도 [[서부전선]]의 주력인 미군-영국군이 [[노르망디 상륙작전]] 이후 독일 본토로 진격하는 동안 자유 프랑스군도 남프랑스의 독일군과 싸웠으며 만 명이 넘는 전사자를 내고, 15만 이상의 독일군을 붙잡는 데 성공한다. 자유 프랑스의 상황이 이랬는데 350~360명 수준에 불과한 광복군이 전쟁을 한다 해도 승전국 대우를 받았을 가능성은 굉장히 낮다. 광복군의 국내 진공 작전이 시작되었으면 어느 정도 활약을 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도 상당히 비관적인데, 일제강점기 조선에는 일본군 수십만 병력이 있었다. [[조선군(일본제국)|조선군]] 참조. 여기에 [[일본 제국 육군]] [[일본 제국 육군/헌병|헌병]], 무장 경찰[* 38선 이남에만 2만 5천명에 달했다고 전해진다.]까지 합치면 답이 없다. 이들은 당시 주요국 기준으로 보면 잡병 집단으로 전락한 지 오래였지만 기본적으로 [[차량화보병]]에 [[치하]] 중형전차, 최신형 [[Ki-84 하야테|하야테]] 전투기 등을 갖추고 있어 고작 몇백 명 정도를 상대하기에는 무리가 없었다. 당시 광복군 규모는 350~360명 수준이었고, 만일 광복군이 전력으로 진공 작전을 시도했다고 하더라도 한반도를 해방시킬 만한 힘은 전무했다. 여기에 17명으로 시작했다는 [[피델 카스트로]]와 [[라울 카스트로]], [[체 게바라]]의 [[쿠바 혁명]] 같은 게릴라전을 언급하기도 하지만, 결국 통치 구조를 통째로 뿌리뽑을 수 있을 만한 대군이 없는 이상 일부 후방 교란으로 일제의 조선 통치엔 흠집도 안 난다. 당시 국내에서 나름 [[비밀결사]] 형태로 활동했던 독립운동 단체가 있었음은 염두에 둬야겠지만 워낙 전력차가 압도적이다. 광복군의 전력이 조선 주재 일본군을 이길 수 있을지부터가 의문인데다 [[OSS]] 문서에서 볼 수 있듯, OSS의 임시정부에 대한 신뢰는 날이 갈수록 약해지고 있었기에, 되려 [[광복군]]에게 시간이 더 있었다 하더라도 차질이 생길 가능성도 있었다. 결정적으로 18일이면 이미 북한 지역으로 [[만주 전략 공세 작전|소련군이 내려오고 있던 시점]]이었으며, 미국이 [[몰락 작전]]을 이유로 미군의 한반도 진입이 늦어져 광복군이 서울 진공 작전이 진행했다고 한들 500명도 안되는 병력으론 큰 성과를 기대하기 힘든 상황인 데다가 하늘이 도와서 성과를 거두어 남한 지역을 차지했다고 하더라도 결과는 북한과 남한 지역에 진주한 소련군과 미군 사이에 끼어 폴란드 꼴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. [include(틀:문서 가져옴, title=13도 창의군, version=14)] [[분류:1908년/사건사고]][[분류:1945년/사건사고]][[분류:대한제국의 사건사고]][[분류:민족 말살 통치기/사건사고]][[분류:조선 의병]][[분류:한국의 독립운동/전투]][[분류:한미관계]][[분류:대한민국 임시정부/사건사고]][[분류:태평양 전쟁/사건사고]][[분류:페이퍼 플랜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